너나들이 봉사활동- 신문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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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자원봉사센터 ‘너나들이’ 대학봉사 동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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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08월 03일 00시 00분 입력
서구자원봉사센터 ‘너나들이’ 대학봉사 동아리
지난달 3박4일 일정으로 여수시 율촌면에 소재한 나환자 수용시설인 사회복지법인 여수애양병원과 고흥군 도양읍에 소재한 국립소록도병원에 봉사활동을 다녀왔습니다.
이른바 문둥병으로 잘 알려진 나병은 현재 한센병으로 명명되어 있습니다. 막연히 두려움과 고정관념을 가지고 임한 봉사활동이었습니다. 이번 봉사활동 참여는 내가 몸담고 있는 한성디지털대학교 영화연구소에서 ‘소록도 리포트’ 라는 다큐멘타리를 한 편 기획하려는 의도가 있어서 마침 가는 길에 취재도 하고 봉사도 하며, 일거양득의 목적을 가진 활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사롭지 않은 깨달음과 한센병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기에, 많은분들과 나누고 싶어 간략히 소회를 전하게 되었습니다.
애양원과 소록도병원에는 음성이거나 양성인 한센병을 치료혹은 요양 중인 환자들이 집단적으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이 신체적 장애와 노령으로 인한 각종 질환으로 고통을 받고 있으며 적절한 치료와 요양이 필요한 분들이었습니다.
故손양원 목사 사랑 가슴뭉클
애양원은 그런대로 한센병이 치료되어 요양하는 노인들이 대부분이었으며, 그곳은 ‘사랑의 원자탄’이란 영화로 유명하신 ‘순교자" 손양원 목사님의 순교 기념관이 있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순교하시기 전 진물이 흐르고 손과 발이 썩어들어 가는 한센병 환자를 내 몸같이 돌 본 손 목사님의 인류사랑은 가슴 뭉클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심지어 입으로 환우의 고름을 빨아내는 목사님의 헌신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성인의 반열에 서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자기희생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애양원에서는 운동장 고르기와 잡초제거 등으로 하루를 봉사하고 손양원 목사님과 함께 신앙생활하며 현재까지 생존해 계신 장로님의 애양원 역사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 분이야말로 살아있는 한센병의 역사적 실증 인물이었습니다. 손은 이미 쓸 수 없게 되었고, 눈은 실명되어 전혀 앞을 볼 수 없는 상태였지만 그 분의 표정과 말씀에는 젊은이 못지않은 패기와 열정이 끓어오르는 듯 했습니다.
낙원같은 겉모습 속은 곪아
다음 날, 여수에서 고흥반도로 약 1시간을 차로 달려 녹동항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손에 잡힐 듯한 거리에 있는 소록도는 그야말로 산림이 우거진 녹음방초의 아름다운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한, 어찌 보면 인간의 낙원이라 불려야 할 정도로 곳곳에 라일락 향기가 진동하고, 산 새소리가 끊이지 않는 태초의 모습을 간직한 섬마을이었습니다. 그러나 작은 산을 넘어 소록도병원에 가니 그곳은 외형과는 정반대로 ‘천형의 땅’으로 다가왔습니다. 아직도 중환자실과 병동에는 많은 환자들이 팔다리를 절단하고, 얼굴은 심각한 기형으로 눈뜨고 볼 수 없는 노인들이 많았습니다. 나는 이틀 동안에 걸쳐 집단 수용된 할머니들의 시설에 들어가 대화를 나누고 취재를 하며, 할머니들에게 안마도 해드리고, 청소를 돕고, 눈물어린 감정으로 내 생애 최초의 뜨거운 인간애를 나누었습니다.
일그러진 얼굴, 어떤 분은 듣지 못하시고, 어떤 분은 볼 수 없어, 서로 듣고 볼 수 있 도록 한 방에 동거하시며 천형으로 인한 인생의 종착점을 향해 살아가시는 분들이었습니다. 얼마나 고마움을 표현하시는지 보이지 않은 할머니들의 눈에는 눈물이 주루룩 흘렀습니다. 문드러진 손 등으로 가까스로 냉장고 문을 여시더니, 음식을 꺼내 먹으라고 권하시는데 순간적으로 당황하기도 했으나, 이내 그 분들의 생애에 포커스를 맞추니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 분들과 음식을 나누고, 지나온 숱한 애환을 들으며, 치밀어 오르는 슬픔을 제어할 길이 없었습니다.
한센인에 남 배려하는 정신 배워
우리들의 누이 같고, 어머니 같고, 할머니 같던 이분들이 어린 나이에 소록도로 들어와 수십년이 지나도록 저주스런 병마의 덫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누구 한 사람 돌보거나 가족으로부터의 위안을 받지 못하고 그야말로 광야에 홀로 떠도는 영혼같이, 하루하루를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던 것입니다. 다행히도 그분들에게 신앙이 있기에 그나마 서로를 위안하며 절대자에게 모든 걸 맡기고, 그 안에서 작은 소망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노라고 고백하시는 것을 보며, 내가 살아온 지난날들이 복에 겨운 투정과 시기와 사욕에 젖어 이웃의 아픔을 배려하지 못했음을 너무나 죄송스럽게 느끼며 속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그날 밤 내 어머니를 여의고 나서 처음으로 그렇게 많은 눈물을 흘려 보았습니다.
우리 모두 나보다 못한 이웃을 위해 배려하고 선행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합시다. 소록도와 애양원에서 그야말로 죽음만을 기다리는 그 분들은 새벽 3시만 되면 어김없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눈물어린 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그런 분들의 기도와 염원이 있었기에 아마도 우리나라가 이만큼 유지되며 잘 살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아무리 자신의 삶이 곤궁하며 험로에 부딪혀 허덕인다 하더라도 누군가를 위하여 간구하고 소망하며,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특정 종교를 떠나 자비를 베푸는 것이며,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의 거대한 공동체 의식에 많은 도전을 심어 주고 있었습니다.
무등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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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08월 03일 00시 00분 입력
서구자원봉사센터 ‘너나들이’ 대학봉사 동아리
지난달 3박4일 일정으로 여수시 율촌면에 소재한 나환자 수용시설인 사회복지법인 여수애양병원과 고흥군 도양읍에 소재한 국립소록도병원에 봉사활동을 다녀왔습니다.
이른바 문둥병으로 잘 알려진 나병은 현재 한센병으로 명명되어 있습니다. 막연히 두려움과 고정관념을 가지고 임한 봉사활동이었습니다. 이번 봉사활동 참여는 내가 몸담고 있는 한성디지털대학교 영화연구소에서 ‘소록도 리포트’ 라는 다큐멘타리를 한 편 기획하려는 의도가 있어서 마침 가는 길에 취재도 하고 봉사도 하며, 일거양득의 목적을 가진 활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사롭지 않은 깨달음과 한센병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기에, 많은분들과 나누고 싶어 간략히 소회를 전하게 되었습니다.
애양원과 소록도병원에는 음성이거나 양성인 한센병을 치료혹은 요양 중인 환자들이 집단적으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이 신체적 장애와 노령으로 인한 각종 질환으로 고통을 받고 있으며 적절한 치료와 요양이 필요한 분들이었습니다.
故손양원 목사 사랑 가슴뭉클
애양원은 그런대로 한센병이 치료되어 요양하는 노인들이 대부분이었으며, 그곳은 ‘사랑의 원자탄’이란 영화로 유명하신 ‘순교자" 손양원 목사님의 순교 기념관이 있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순교하시기 전 진물이 흐르고 손과 발이 썩어들어 가는 한센병 환자를 내 몸같이 돌 본 손 목사님의 인류사랑은 가슴 뭉클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심지어 입으로 환우의 고름을 빨아내는 목사님의 헌신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성인의 반열에 서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자기희생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애양원에서는 운동장 고르기와 잡초제거 등으로 하루를 봉사하고 손양원 목사님과 함께 신앙생활하며 현재까지 생존해 계신 장로님의 애양원 역사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 분이야말로 살아있는 한센병의 역사적 실증 인물이었습니다. 손은 이미 쓸 수 없게 되었고, 눈은 실명되어 전혀 앞을 볼 수 없는 상태였지만 그 분의 표정과 말씀에는 젊은이 못지않은 패기와 열정이 끓어오르는 듯 했습니다.
낙원같은 겉모습 속은 곪아
다음 날, 여수에서 고흥반도로 약 1시간을 차로 달려 녹동항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손에 잡힐 듯한 거리에 있는 소록도는 그야말로 산림이 우거진 녹음방초의 아름다운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한, 어찌 보면 인간의 낙원이라 불려야 할 정도로 곳곳에 라일락 향기가 진동하고, 산 새소리가 끊이지 않는 태초의 모습을 간직한 섬마을이었습니다. 그러나 작은 산을 넘어 소록도병원에 가니 그곳은 외형과는 정반대로 ‘천형의 땅’으로 다가왔습니다. 아직도 중환자실과 병동에는 많은 환자들이 팔다리를 절단하고, 얼굴은 심각한 기형으로 눈뜨고 볼 수 없는 노인들이 많았습니다. 나는 이틀 동안에 걸쳐 집단 수용된 할머니들의 시설에 들어가 대화를 나누고 취재를 하며, 할머니들에게 안마도 해드리고, 청소를 돕고, 눈물어린 감정으로 내 생애 최초의 뜨거운 인간애를 나누었습니다.
일그러진 얼굴, 어떤 분은 듣지 못하시고, 어떤 분은 볼 수 없어, 서로 듣고 볼 수 있 도록 한 방에 동거하시며 천형으로 인한 인생의 종착점을 향해 살아가시는 분들이었습니다. 얼마나 고마움을 표현하시는지 보이지 않은 할머니들의 눈에는 눈물이 주루룩 흘렀습니다. 문드러진 손 등으로 가까스로 냉장고 문을 여시더니, 음식을 꺼내 먹으라고 권하시는데 순간적으로 당황하기도 했으나, 이내 그 분들의 생애에 포커스를 맞추니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 분들과 음식을 나누고, 지나온 숱한 애환을 들으며, 치밀어 오르는 슬픔을 제어할 길이 없었습니다.
한센인에 남 배려하는 정신 배워
우리들의 누이 같고, 어머니 같고, 할머니 같던 이분들이 어린 나이에 소록도로 들어와 수십년이 지나도록 저주스런 병마의 덫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누구 한 사람 돌보거나 가족으로부터의 위안을 받지 못하고 그야말로 광야에 홀로 떠도는 영혼같이, 하루하루를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던 것입니다. 다행히도 그분들에게 신앙이 있기에 그나마 서로를 위안하며 절대자에게 모든 걸 맡기고, 그 안에서 작은 소망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노라고 고백하시는 것을 보며, 내가 살아온 지난날들이 복에 겨운 투정과 시기와 사욕에 젖어 이웃의 아픔을 배려하지 못했음을 너무나 죄송스럽게 느끼며 속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그날 밤 내 어머니를 여의고 나서 처음으로 그렇게 많은 눈물을 흘려 보았습니다.
우리 모두 나보다 못한 이웃을 위해 배려하고 선행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합시다. 소록도와 애양원에서 그야말로 죽음만을 기다리는 그 분들은 새벽 3시만 되면 어김없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눈물어린 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그런 분들의 기도와 염원이 있었기에 아마도 우리나라가 이만큼 유지되며 잘 살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아무리 자신의 삶이 곤궁하며 험로에 부딪혀 허덕인다 하더라도 누군가를 위하여 간구하고 소망하며,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특정 종교를 떠나 자비를 베푸는 것이며,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의 거대한 공동체 의식에 많은 도전을 심어 주고 있었습니다.
무등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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