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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명예교수의 서울대 입학식 축사 \"떴다 떴다 비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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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임형택
댓글 0건 조회 853회 작성일 08-03-04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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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뛰게 하는 희망과 도전의

이어령 명예교수님의 서울대 입학식 축사 읽어보기 바랍니다.



* 이어령 명예교수의 서울대 입학식 축사 "떴다 떴다 비행기"

[ 2008-03-03 오전 9:12:50 ][CBS 사회부 정보보고]

▣ 이어령 명예교수의 서울대 입학식 축사 전문 - 고차방정식을 푸는 창조적 지성



오늘 나는 여러분들의 입학을 축하하기 위해서 그리고 4년 동안의 보람있는 대학생활을 성원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는 선현들의 성스러운 말도 노벨상 수상작가의 감동적인 작품도 더더군다나 무슨 미래학자의 충격적인 예언 같은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어렸을 때 불렀던 너무나도 뻔 한 “떴다 떴다 비행기”라는 노래입니다. 모두들 웃겠지요. 하지만 하찮은 이 동요 하나가 전쟁 속에서 비참한 대학생활을 하고 있던 나에게 꿈과 용기를 준 응원가였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음속보다 빠르게 나는 제트기를 처음 목격하였을 때 “왜 우리에게는 아이커라스의 신화가 없는가” “어째서 한국의 역사책에는 하늘을 날려다 떨어져 죽었다는 미치광이들의 기록이 없는가” “비행기가 발명되기 전 9세기의 안다르시아에는 무아인 필나스나가 있었고 11세기 영국의 맘즈베리에는 수도사 오리봐가 있었다. 그리고 15세기의 이탈리아에는 조반니 바티스가 있었는데 한국에는 누가 있었는가.“ 라고 소리쳤지요.



내 자신의 모습이 땅바닥에 붙어있는 한 마리 지렁이처럼 보였습니다. 피난지의 판자 집 가교사에서 듣는 세익스피어의 강의보다는 교회에서 “비전이 없는 백성은 망하는 도다”의 잠언이 더 절실하게 느껴졌지요.

  하지만 그때 문뜩 기억속에 들려 온 것이 “떴다 떴다 비행기 날아라 날아라 높이 높이 날아라 우리 비행기”의 노래 소리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비행기라는 말 대신 나의 이름을 내 불쌍한 젊은 친구들의 이름을 그리고 내 가난한 대학의 이름과 조국의 이름을 넣어 불러보았습니다.



애뜻한 이 비행의 희원 속에는 놀랍게도 기어 다니는 것과 뜨는 것이 다르고 뜨는 것과 나는 것이 다르고 그냥 나는 것과 높이 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지요.



떠있는 것과 나는 것 그렇지요. 대학시험에 합격하였을 때 부모님들과 주위 사람들은 모두 “아무개가 떴다고 좋아했을 겁니다.” 우리는 떴다는 말을 좋아 합니다. 남을 띠어주기도 하고 남에게 띠워 달라고도 합니다. 여러분들은 치열한 입시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포복을 했습니다.



구속에서 벗어나 무중력 상태에 떠있던 화려한 부상 그런데 이번에는 다시 “날아라 날아라”라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래요. “뜨는 것”과 “나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대기든 물 위에든 떠있는 것들은 모두 타율의 힘에 의해 움직입니다. 그래서 구름이나 풍선은 흘러가거나 터지거나 추락하고 맙니다.



거품이나 부평초는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밀려다닙니다. 하지만 날개를 지닌 독수리는 폭풍이 불어도 구름위에서 빛나는 태양을 향해 날아오릅니다. 지느러미를 지닌 잉어는 급류와 폭포수의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 용문에 이릅니다. 죽은 고기만이 물위에 떠서 물결을 따라 흘러가지요.



동물학자들의 말대로 새와 물고기들은 이상하게도 유체(流體)에 거슬러 올라가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날기 위해서는 양력과 방향을 결단하는 자율의 의지와 그리고 전진할 수 있는 동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높이 날기 위해서는 꿈이 필요합니다. 먹이 감만을 찾아 바다의 수면에 붙어사는 갈매기들과 하늘 높이 자유롭게 위해서 비행연습을 하는 ”갈매기의 꿈“ 조나단의 이야기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대학이여 높이 날아라 이 입학식장에서 다시 잊혀져 가는 옛날 그 동요를 불러보십시오. “비행기”란 말 대신에 자신의 이름을 여러분들이 선택한 학문의 이름을 그리고 우리 서울 대학교와 붉은 악마들이 목터지게 외쳤던 우리 대한민국의 이름을 넣고 불러보십시오. ‘좁은 문’이요 ‘지옥의 문’처럼 보였던 대학 문이 크고 넓은 하늘의 무지개처럼 활짝 열릴 것입니다.



입시공부의 모노크롬이 아닙니다. 빨주노초파남보의 다양한 색깔을 한 하늘을 향한 새로운 경주가 시작된 것입니다. 좁은 골목에서는 모두가 한 방향으로 뛰었기에 오직 선두의 한사람만이 승리자가 되었지만 원광처럼 퍼진 개방된 공간에서는 각자 원하는 방향을 찾아 날 수 있고 모두가 승리자일 수 있습니다.



높이 나는 공부는 일등이 되는 ‘베스트 원’이 아니라 ‘온리 원’의 독창성을 발휘하는 승부입니다. 다양성과 개방성 그리고 자율성이 비상하는 여러분들의 동력이 될 것입니다. 학교는 더 이상 미셀 푸코가 말하는 감옥과 같은 국가의 거대한 감금 장치가 아닌 것입니다.



광산의 카나리오 대학을 “광산의 카나리아”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카나리아는 공기에 민감해서 갱안이 오염되면 먼저 죽게 되고 사람들은 그 경보를 통해서 위험을 감지합니다. 그래서 학교는 칸트가 “영구평화론”에서 밝힌 국가의 도덕적 발전 단계와도 흡사한 것입니다.



처음 유치원에 들어갔을 때에는 기율이 없는 상태이고 초,중,고는 “타율”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 단계가 대학이라는 “자율”의 단계입니다. 대학이나 국가나 높이 날기 위해서 무기율과 타율의 단계를 거쳐서 “자율”의 삼단계로 부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칸트는 인간성을 단순한 수단으로 여기는 시민사회를 “수단의 왕국”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시장원리에 따라 행동양식이 바뀌게 되면 교육의 유용성이 유의성을 지배하게 됩니다. 교육자와 피교육자간의 관계도 단순히 공급자 - 소비자의 관계로 바뀌어가고 도구 학문 이외의 것은 인기가 높지 않습니다.



취업 율이 낮은 인문학의 황폐와 3D처럼 직종이 고된 엔지니어 과목은 이공계라도 불모지입니다. 영구평화의 이상으로 삼았던 사회 자율적인 자유를 지닌 “목적의 나라”와는 멀어지게 됩니다. 삶의 인격을 목적으로 하여 인간들이 서로 존중하며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의무교육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교육 (selt education, autodidacticism )이 날개가 됩니다.



대학의 창조활동 높이 난다는 것은 “자기목적적” (autotelic)인 창조의 행동을 의미합니다. 희랍어로 자기를 뜻하는 auto와 목적을 의미하는 telos에서 나온 것으로 그 자체로 의미를 갖거나 충족되는 활동을 일컫는 말입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만약 오늘날의 대학이 취업이나 권력이나 명리를 얻기 위한 “수단의 왕국”이 되어 버린다면 대학의 특권이 다양성 개방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자율성은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대학은 아프리카의 영양 “스프링복스”와도 같은 현상을 자아내게 됩니다.



스프링복스는 한 마리기 무엇에 놀라 뛰면 다른 것들도 덩달아 뛰는 습속이 있어 무리 전체가 뛰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집단 사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우리는 뜬다는 말을 잘 씁니다. 배우나 정치인들이 인기를 얻고 유명해지는 것을 뜬다고 합니다. 그냥 “뜨는 것”이 아니라 “띠워 준다.”고도하고 “띠워 달라”까지 합니다.



그런데 뜨기만 하고 날지를 못하여 물거품처럼 꺼지거나 풍선처럼 터져 추락하고 맙니다. 인기인이 그렇고 잘나가든 기업이 그렇고 사회와 나라전체가 그렇게 됩니다. 한국과 한국인은 확실히 지구공간에 떴습니다. 한강의 기적으로 경제가 떴고 IT로 인터넷이 떴고 드라마와 영화로 한류가 떴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뜨기만 하고 아직 날지를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뜻없이 “높이 높이 날아라 우리 비행기”라고 고래고래 외쳐대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심상찮게 들립니다. ”우리 비행기“라는 대목에 와서는 콧날이 찡해지기까지 합니다.



수학의 천재 에바리스트 갈루어는 여러분들과 같은 21살에 당시의 난 문제인 5차방정식에는 대수학의 공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그는 결투로 부상을 입고 세상을 떠나면서 유일한 혈육 동생에게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 21살의 나이에 죽기위해서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단다”



인터넷의 웹 2.0은 ‘리드 온리’(read only)에서 '리드 앤 라이트‘(read and write)의 쌍방향의 고차방정식이 되었습니다. UCC(user created contents)로 상징되는 것처럼 유저들이 인터넷의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학생들의 손으로 대학도 2.0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대학의 새내기들이 떴습니다. 우리 서울대학교와 우리 조국 한국이 떴습니다. 이제 새내기들이 날아야 모든 것이 날수 있습니다. 추락하지 않고 높이 높이 날수 있습니다. 스무살 여러분들의 용기로 아무도 풀지 못한 고차방정식의 X파일이 풀어질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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